[회원에세이]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거야 - 6편 나는 아동 성폭력 피해생존자

사무국
2024-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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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안녕하세요, 고양여성민우회입니다. 한 회원으로부터 에세이 원고를 받았습니다. 성폭력 피해를 지나온 경험을 담담하게 써내린 글이었습니다. 회원님께 이렇게 귀한 글을 왜 민우회에 보내셨냐고 여쭤보았습니다. 회원님께서 제일 처음 해주신 말씀은 자신의 글이 다른 고양여성민우회 회원들, 더 나아가 다른 여성과 성폭력 피해자, 우울증 환자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이었습니다. 자신이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글에 등장하는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해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회원님께서 전화로 전해주신 말씀을 인용하며 연재글을 시작합니다.
"여러분 주위에 이런 아픔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이라도 찾아봐주고 같이 밥을 먹어주면 그 사람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글이 희망의 증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성폭력 피해와 우울증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언어화시키지 못해 괴로워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런 분들도 자기 고통을 기꺼이 드러낼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다들 죽지 않고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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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동 성폭력 피해생존자

다시 돌아가, 왜 제가 성폭력 피해에 대해 절대 물러서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답해야 할 시점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아동 성폭력 피해의 생존자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8살 때까지 살았던 곳은, 전남 무안군 해제면 산길리 구등부락입니다. 1988년까지 상반기 때까지 살았습니다. 1980년대의 농촌과 어촌이 공존하던 그곳은, 인권 의식 또는 여성의 인권에 대해서는 무지한 곳이었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저희 어머니가 왜 여아의 안전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었는지입니다. 최근에 이 문제에 대해 여쭤보니, 어머니는 무척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본인이 자란 곳은 그런 폭력이 없었고, 여자아이들이(제 생각으로는 어머니 본인이 그런 피해 경험이 없기에 일반화하셨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런 성폭력에 노출될 거라 상상도 못 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저의 경험에 대해 할 말을 잃으셨답니다.


나의 자궁은 파괴되지 않았다

저는 둘째라 호기심도 많고, 어깨너머로 배우는 게 많아서인지, 6살부터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바로 국민학교에 입학하는 게 다반사였던 그 시절, 그 공간. 6살 때는 교회부설 유치원을 다녔고, 7살 때는 국민학교 병설 유치원엘 다녔습니다. 문제는 국민학교 유치원이 집과 너무 멀었다는 점이지요. 

그 당시 마을에선 전 학년 국민학교 아이들이 다 같이 모여서 등하교하였습니다. 저 역시 그 무리 속에서 등하교했었는데, 하필 그날은 유치원이 일찍 마쳐서인지, 일찍 끝나게 되었습니다. 학교 근처 교회 밭을 목사님 대신 일궈주는 일을 부모님이 하셨습니다. 그날 일찍 마친 김에, 그 밭에 들려서 부모님과 함께하다, 배가 고팠는지, 제가 칭얼댔나 봅니다. 엄마는 저보고 먼저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시곤, 마저 일을 마치고 가겠다 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저 혼자 그 먼 길(대략 3km) 을 가도 아무 문제도 없을 거로 생각하셨나 봅니다.


혼자 길을 가다, 부모님이 오시는지 자꾸 뒤돌아보느라 시간은 많이 지체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낮의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던 날이었기에, 땅에선 열기가 올라오던 그런 날이었습니다. 중간쯤 왔을 때 뒤돌아보니, 저 멀리서 한 사람이 걸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저는 키도 크고 걸음걸이가 아빠 같아서, 아빠가 오시나보다 하며,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기다렸습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얼굴의 형체가 아빠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처음 보는 얼굴의 중학생 남자였습니다. 7살 어린 나이였기에, 중학생 남자아이는 매우 커 보였습니다. 


참 이상하게도, 저는 아무도 없는 그 시골 벌판길에서 불안함을 느꼈습니다. 어두운 밤은 아니지만, 소리쳐도 도움을 얻을 수 없는 벌판. 그래서인지, 저는 오히려 비굴하게 그 중학생에게 낮은 자세로 임했습니다. 더 밝게 웃고, 친근하게 굴었지요. 분위기가 점점 묘해지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습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데, 벗어날 수 없는 공포가 온몸을 조여 왔습니다. 


파편화된 공포의 기억

그런데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보았던, 굴처럼 만든, 상하수도처럼 생긴 커다란 공간. 바닥은 모래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떻게 그곳으로 끌려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억지로 끌려갔는지, 자발적으로 마지못해 따라갔는지. 그리고 바닥에 눕혀졌고, 속옷이 벗겨졌고, 그다음 그 중학생이 자기의 성기를 내 성기에 삽입하려고 했지만, 아직 여물지 않았던 제 성기가 작아서 삽입하지 못해 끙끙거리던 신음소리가 배경으로 깔렸던 거 같습니다. 


나를 때렸던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같이 그곳에서 걸어 나오는걸, 자전거를 타고 오시던 아빠가 발견하시곤, 저를 뒤에 태우고 가면서 그 중학생 남자애를 지속해서 때리시던 것만 기억이 납니다. 아빠 허리를 붙잡고는 쟤가 나를 때렸다고만 말했지,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묘사하지 못했던 거 같습니다. 어린아이였기에 자기가 당한 일을 언어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아버지는 그날 일을 어머니에게 고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괜찮냐고 묻질 않으셨거든요. 그리고 저 역시도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못 했습니다. 엄마를 걱정시킬 것만 같았고, 이야기하면 오히려 엄마가 저에게 화낼 것 같아 무서웠습니다. 


조두순 사건 당시, 피해자가 자궁 및 대장이 파괴되어, 평생 대소변 주머니를 차고 살아야 한다는 기사를 보았을 때, 다행히(?) 내 가해자가 중학생이었기에 내 자궁이 파괴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제가 수도권으로 이사 온 후, 여전히 그곳에 살았던 제 8촌 고모는 고등학교 때 저녁에 하교하다 강간당하여, 자궁이 파괴되어 임신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최근에서야 들었을 때, 어쩌면 제가 그곳에 남았다면 그런 피해를 당하였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만연한 아동 성폭력

문제는, 그런 성폭력이 단 한 번뿐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시기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나는 순서대로 말해보겠습니다. 뒷집으로 놀러 갔는데 그 집 군인 아들이 휴가를 나왔나 봅니다. 군복을 입은 남자가 저를 보더니, 대청마루로 데려가서는, 저를 감싸면서 자기의 손을 제 팬티에 집어넣고는 제 성기를 만져댔습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던 게 기억이 나네요.


또 한 번은 아빠를 따라 윗마을 어떤 집에 방문했는데, 그 집 방 안에 들어갔다가 그 방에 있던 남자가 저에게 뽀뽀해 봤냐며, 자기가 알려주겠다며, 자기의 혀를 제 입에 넣기를 몇 분간 지속했지요.


삶의 자리와 타인의 고통

지금 돌이켜 보건대, 1980년대 농어촌지역에서 여성, 어린아이에 대한 성추행과 성폭력은 만연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러지 않고는 제가 당한 성폭력 피해를 설명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엄마는 그런 경계를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엄마는 어린 시절 그런 경험이 없이 자라났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그런 경험이 있었다면, 고명딸인 저를 그렇게 방치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란 자기의 경험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자기가 경험한 그 세계가 전부라고 이해하고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타인의 고통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 있지 아니하면, 그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됩니다.

* 독일어로 ‘삶의 자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인데,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특정 공동체가 어떤 생활의 상황 가운데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성서에 있어서는 ‘양식비평’과 깊은 관련이 있는 말 


살아남기 위한 이해

저에게 그 경험은 더 이상 고통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자랄 때 집안의 불화, 경제적인 고통으로 인해 가정이 저의 정신적, 정서적 베이스가 돼 주지 못했을 때, 그 자리를 신(神)으로 메꾸었는데... 기독교의 예정론은 그때의 고통에 대해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통증이 되어 저를 괴롭히더군요. 모든 것이 신의 섭리이고, 신이 예정했다고 하는데... 왜 신은 그 어린 나에게 그런 폭력을 예정해두었을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난 살기 위해서 신을 선택했는데, 오히려 신은 나를 시험에 들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신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없다면, 저는 정말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지면이 허락되면 말해보기로 하지요.


다시금 Me too

그래서인지 저는 불안한 눈빛으로 남자 손에 끌려가는 여자아이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그 불안한 눈빛 잘 알거든요. 저는 왜 성폭력 피해자들이 반항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압니다. 공포 속에서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합니다. 피해자가 되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2016년 여름에 당했던 성희롱. 저는 그때도 그와 같은 무력감을 느꼈지요.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둘려싸여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는 성희롱에 충격을 받았고, 그 성희롱에 대해 아무도 제재하지 않고 침묵했다는 점에 또 충격을 받았으며, 7급 승진을 앞둔 시점에 G지원장에게 한마디 해보지 못하고,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부들부들 거리며 분노한 제 자신에 대해 실망했지요. 

어쩌면 저에게 어린 시절 당했던 성폭력보다, 36살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아줌마(?)가 당한 성희롱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지요. 이미 알대로 다 아는 나이인데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했던지라 감출 수 없는 수치심(羞恥心)·모욕감(侮辱感)이 저를 더 옥죄어왔기 때문이지요. 

저를 위아래로 홅으면서, 저의 드러난 다리를 보면서 “오~ 아줌마 같지 않네~”하던 G지원장. 아줌마에 대한 비하, 그리고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폭력. 여성혐오의 표본을 보여주었던 인간. 그전 민사과 회식때, 갓 입사한 여자 실무관들을 껴안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조심했어야 하는데. 


뒤 늦은 외침

1년 반 뒤에 Me too 설문 조사 때, 나는 당신에 대해 까발리고 싶었어. G지원장이라고 하는 인간의 실체를. 인권의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 하. 당신은 무사히 법복을 벗고, 변호사입네 하고 활동하고 다니겠지. 내가 그때 페미니즘에 대해 더 정확히 알고, 더 많은 이론으로 무장하고, 더 괜찮은 정신 상태였다면, 아마 당신을 탄핵시키기 위해 뭐라도 했을 거야.

그리고, 그 당시 총무과장. 난 노조 다면평가때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써. 

당신은 책임자가 되어서는 안 돼. 

국장승진을 바라보는 시점에 모든 걸 조용히 덮고 가고 싶었겠지.

당신의 승진은 그 G지원장이 흘린 피로 그리고 그 희생자를 은폐하면서 만들어진 거야. 

다시금 G지원국장으로 와서, 망가져가는 나를 보며 속으로 웃었을 당신을 생각하면 아직도 화나. 

지 앞가림이나 잘하지, 그런 정신 상태로 무슨 노조지부장을 하겠다고 난리치다 이리 망가져갔나 하면서 고소해했을 당신. 

그런 당신에게 고개를 숙여가면서, 그렇게 좋지도 않은 보직, 종합민원실 제증명자리로 바꿔달라 빌었던 나를 생각하면 아직도... 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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