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에세이]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거야 - 2편

사무국
202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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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안녕하세요, 고양여성민우회입니다. 한 회원으로부터 에세이 원고를 받았습니다. 성폭력 피해를 지나온 경험을 담담하게 써내린 글이었습니다. 회원님께 이렇게 귀한 글을 왜 민우회에 보내셨냐고 여쭤보았습니다. 회원님께서 제일 처음 해주신 말씀은 자신의 글이 다른 고양여성민우회 회원들, 더 나아가 다른 여성과 성폭력 피해자, 우울증 환자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이었습니다. 자신이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글에 등장하는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해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회원님께서 전화로 전해주신 말씀을 인용하며 연재글을 시작합니다.

"여러분 주위에 이런 아픔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이라도 찾아봐주고 같이 밥을 먹어주면 그 사람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글이 희망의 증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성폭력 피해와 우울증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언어화시키지 못해 괴로워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런 분들도 자기 고통을 기꺼이 드러낼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다들 죽지 않고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노동조합 사무국장이다?

마녀사냥이 끝날 때쯤, G 지부는 5개 기관과 단체협약을 맺어야 했습니다. 다른 4개 기관과의 단체협약은 순조로이 2주 안에 모두 마무리되었지만, 그 당시 G 지원 총무과장, 국장이 인사이동이 있기 전까지(2019년 1월) 협상이 체결되지 못했습니다. 총무과장은 그 당시 막 부 이사관으로 승진하여 직책은 과장이나 직급은 국장이라, G 지원엔 사실상 국장이 2명이나 있는 것과 다름없었고 나머지 국장 역시 벽창호(?)로 유명한 사람이었기에 둘 사이는 그다지 좋지도 않아서, 권력의 서열이 정리가 되지 않아 협상의 진척은 없었습니다. 더욱이 막 승진한 부이사관은 승진에 취해서인지, G 지원장(지법 부장판사)도 단체교섭위원일 뿐, 어떤 힘도 없다면서 G 지원장을 깔아 내리는 발언을 해 G 지원장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지요.

저는 2018년 10월부터 3달간 이어진 G 지원 단체교섭의 난항에 지칠 대로 지쳐서, 그냥 울면서 다녔습니다. 지부장은 저에게 너무 미안하다며 연신 저를 달랬지만, 저는 더 이상 견뎌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도움이 된 법원

그때 법원조직이 저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은 마음정신상담 코스였습니다. 저는 그전부터 제 개인적인 문제로 2016년부터 라이프코칭(상담사와의 상담)을 받아왔는데 이번엔 정신과 의사의 상담이 필요했습니다. 정신분석학회에서는 저를 한 정신과 의사와 연계해 주었고, 그 의사와 저는 매주 수요일 만났습니다. 그때 그 의사는 약을 권했지만, 저는 약보다는 다른 방식, 즉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정신과 의사는 제 분노와 제 방식에 대해 우려를 보냈지만, 저는 그때 의사의 말을 듣지 않고 제 방식대로 분을 풀기로 하였습니다. 

미친 듯이 코트넷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밥을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살이 점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새벽까지 컴퓨터를 붙잡고 앉아있었습니다. 잠을 자지 않아도 아이들 케어에, 가사에, 회사 일까지 척척 해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말이 사라져가고, 언어가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육체의 한계에 다다르고, 2년간의 노조 간부 활동에 지쳐갈 때쯤, 나는 지부장이 되어야 할지, 그냥 조합원이 되어야 할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지부장이 되어야 할 의무

노조 간부 활동을 하느라고, 인생을 희생한 G 위원장님, 지부장 활동 2년 후 노조 임원 생활을 정리한 K 지부장님, 더 이상 지부장을 할 사람이 없어서 23기임에도 사무관 시험 준비도 포기하고 지부장으로 헌신한 S 지부장님. 그 밑에서 숨 가쁘게 뛰어오니 그 바통을 제가 이어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처음엔 거부하다가, S 지부장님이 다른 지법으로 가버리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쩔 수 없이 지부장 선거에 나가게 됩니다.


코로나와 코로나 블루

2020년엔 전대미문의 팬데믹이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그 당시 G 지원과 맺은 단체협약으로 지부장이 전임으로 일할 수 있도록 업무를 조절하여 자리 하나를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를 만들기 위해 다른 직원들이 업무는 가중되어 있었고, 지부장으로 저는 그분의 희생에 누가 되지 않고자 열심히 일을 하려 했습니다. 2020년 상반기에 지부장으로서 여러 사업들을 벌였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혈액이 부족하다 하여, 5개 기관장과 협의하여 헌혈사업을 벌이기도 했고, 소상공인을 돕는 차원에서 화분 나눠주기 사업도 진행했습니다. 또 법원공무원교육원에 G 지부 분사무실도 마련했습니다.

그러던 중, 법원사무관 시험 존폐와 관련한 법원 노조의 입장과 관련하여, 조합원들의 거부반응이 심해졌습니다. 그나마 우리가 윗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승진할 수 있는 게 시험인데, 그 시험이 없어지면, 앞으로 윗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해야 승진하는 거 아니냐며. 시험에 대한 병폐보다는, 공정한 승진을 담보할 수 없음에 대한 불만이 더 큰 시절이었습니다. 


1차 붕괴

2018년부터 누적된 노조 간부로서의 피로와 저 때문에 누군가 더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 애써 노력한 것은 당연한 것이 되고, 원하는 바를 이뤄주지 못하면 비난을 받는 노조 지부장으로서의 부담감은 나를 점점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도 없이 불 꺼진 6층 노조 사무실에서 뛰어내릴까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저는 신청과 S 前 과장님께 병가를 써야겠다고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S 前 과장님은 피폐해진 저를 안타까워하며 과 운영은 신경 쓰지 말고 병가를 쓰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직 지부장님은 직책을 갖고 병가를 쓰라 했지만, 저는 그놈(?)의 노조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책임하게 6개월 만에 지부장직을 사퇴하고 병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부터 항우울제를 복용하였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환자가 급증했다며, 입원실이 없으니 외래로만 약을 처방받으러 오라 했습니다. 병가 두 달을 끝내고 신청과로 복직하자, 경매접수와 지급위탁 두 가지 과중한 업무로 힘들어하시던 K 계장님의 지급위탁 업무를 맡게 됩니다. 

노조 간부로서 일을 하지 않고 오로지 일만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주위의 동기들이 나를 버티게 해주었지요. 그리고 장기국외연수에 예비 선발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불행 끝 행복 시작인가 싶었습니다. 영어성적을 갖추고 나서, 이제 계획서만 쓰면 되던, 장밋빛인생이 그려질 즈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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