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안녕하세요, 고양여성민우회입니다. 한 회원으로부터 에세이 원고를 받았습니다. 성폭력 피해를 지나온 경험을 담담하게 써내린 글이었습니다. 회원님께 이렇게 귀한 글을 왜 민우회에 보내셨냐고 여쭤보았습니다. 회원님께서 제일 처음 해주신 말씀은 자신의 글이 다른 고양여성민우회 회원들, 더 나아가 다른 여성과 성폭력 피해자, 우울증 환자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이었습니다. 자신이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글에 등장하는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해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회원님께서 전화로 전해주신 말씀을 인용하며 연재글을 시작합니다.
"여러분 주위에 이런 아픔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이라도 찾아봐주고 같이 밥을 먹어주면 그 사람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글이 희망의 증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성폭력 피해와 우울증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언어화시키지 못해 괴로워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런 분들도 자기 고통을 기꺼이 드러낼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다들 죽지 않고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애도되지 못한 죽음
(사진설명) 나만의 애도_유리마루 故 임은진, 평안하시길
2021년 1월, 2012년 9월에 파주에 이사 온 후 8년 동안 알고 지낸, 미용실 원장님의 죽음을 듣게 됩니다. 1인 숍을 운영하여, 예약된 그 시간엔 그 한 사람의 머리 손질부터 샴푸까지 모두 혼자 운영하는 미용실 원장님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공간은 일종의 상담실처럼 운영이 되어, 손님은 내담자가 되고, 미용사는 상담자가 되어, 삶의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도 그 원장님과 말이 잘 통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책 이야기, 영화 이야기, 삶에 관한 이야기, 종교에 관한 이야기 등 머리를 하면서, 수다를 떨고 일종의 치유되는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던 중, 저의 우울증 이야기를 하자, 그분 역시 공황장애로 약을 복용 중이라는 고백을 하셨습니다. 동병상련이라 그런지, 서로 잘 이겨내자며 응원해 주곤 했는데... 예약하려고 카톡을 봤는데, 카톡 프로필 사진이 영정사진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임은진 원장님,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장이 어디인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그 어떤 정보도 없이 그 한 줄로 그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게 됩니다.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고,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 수도 없었기에, 그 죽음에 대해 어떻게 애도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떨어져 살았던 사랑하는 딸아이가 중학생에 접어들어, 함께 산다고 행복해했던 사람이, 왜? 도대체 왜? 왠지 저는 그가 스스로 목숨을 버렸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코로나의 장기화로 인해 소상공인들의 폐업이 줄을 잇던 시절이었고, 갖고 있던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그를 더 압박했으리라 추측해 보지만, 차라리 다른 사고로 생을 마감해 주셨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왠지 그의 죽음이 곧 저의 죽음의 전주곡처럼 저를 곧 소환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2차 붕괴_형사과 참여관 부적응
그 이후로 저는 글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글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말도 주어, 서술어가 깨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나마 배려받은 적은 업무로 인해 하루하루 출근하고, 일하다 집에 가서 잠을 자고 다시 출근하고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무엇인가 생산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판단력도 떨어져서, 그저 해오던 일을 해야 했는데, 7월에 형사과로 옮기게 됩니다. 참여관으로서는 신규인 데다, 형사업무는 신규로 발령받기 전 4개월 동안 대체 근무한 게 다라 일주일에 2번 형사 참여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형사과는 격무부서라 재판 들어가기 바쁘고, 나와서는 조서 치기 바쁜 곳이었습니다. 실무관들은 항소 기록을 조제하느라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지요. 나만 정신 차리고 적응하면 되었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게 문제였습니다.
첫 재판을 들어가자마자 숨이 막히기 시작했습니다. 여름이라, 체력이 약해진 데다, 증인신문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어지럽고 토하고 싶어졌습니다. 휴정이 선언되자 법복을 입은 채로 미친 듯이 법원 밖으로 뛰쳐나와 가쁜 숨을 내쉬었습니다. 매주 두 번씩 재판하다가는 심장이 멈추든지 아니면 숨이 멈춰버릴 것 같았습니다.
과장님과 판사님께 말씀드려서 휴직하려 했지만, 이미 정기인사가 끝난 시점이고 형사 참여는 비선호 보직이라 당장 참여관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재판은 돌아가야 했기에, 저는 종합민원실 제 증명 담당하는 행정관님과 맞트레이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제 증명 담당 행정관님은 제 증명보다는 형사 참여가 낫다고 판단하여, 저의 제의에 흔쾌히 응해주셨고, 저는 보름 만에 형사과에서 종합민원실로 발령 나게 됩니다.
3차 붕괴_종합민원실 행정관 부적응
이미 한번 정신이 나가 있는 데다, 형사 조서를 치지 못한다는 좌절감으로 업무에 대한 두려움은 커지기만 했습니다. 더욱이, 제 증명 업무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민원인들을 상대하느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데다, 정신없는 와중에 10시만 되면 우편으로 접수된 제 증명신청서가 쏟아져 내려 민원 처리하랴, 우편 처리하랴 숨이 턱턱 막히는 데, 전산화가 안 된 결정문을 창고에서 찾아 복사하랴 여름 원피스를 입었는데도 손바닥, 발바닥, 겨드랑이 등은 땀으로 범벅이고... 그러다보니, 아침마다 회사에 가는 게 꼭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아침이 오는 게 싫었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이면, 계단으로 6층을 올라가 옥상 문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습니다. 확실히(?) 죽으려면, 화단이 아니라, 지하 1층 식당 계단으로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까지 해보았습니다. 유서를 써놓고, 몇 번이고 고치기도 했지요.
명예퇴직한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해주다 이러다 사람이 잘못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제 손을 붙잡고 종합민원실 실장에게 이 사람 휴직해야겠다고 대신 말해주고 그 길로 바로 법원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우울증의 터널로 접어들다
처음엔 회사 일을 하지 않아서 해방감을 느꼈지만, 점차 병은 악화일로로 치닫게 됩니다. 우울증은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의 활동을 멈추게 합니다. 오로지 잠만 자게 하는 병입니다. 식욕도, 성욕도 앗아가고, 생의 모든 것이 의미 없게 됩니다. 세수하는 것조차 버거우니, 요리하는 것은 엄두를 보냅니다. 밥을 어떻게 안쳐야 하는지도 잊어버려, 허둥지둥합니다. 씻지를 않으니 나가고 싶지도 않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지도 않지요. 코티졸 호르몬은 노화를 촉진하여 흰 머리카락이 나게 합니다. 몸이 느려지고 둔해져서 신진대사량이 줄어들어 평소와 별다른 바 없이 먹어도 살이 불어나게 되지요.
생에 대한 기쁨이 없으니,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막하기만 하여, 빨리 심장이 멈춰 생을 마감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랍니다. 나 혼자 죽으면 애들이 괴로워할 테니, 가족들끼리 함께 조용히 한날한시에 사라지는 나쁜 상상도 해봤습니다. 애들의 미래가 암울하게 보여서, 이 아이들의 인생도 나처럼 우울해지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차라리 내 책임하에 낳았으니 내 책임하에 생명을 거둬들이고 가는 게 옳은 일이 아닐까 하는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했습니다.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거야 - 1편 보러가기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거야 - 2편 보러가기
(편집자 주)안녕하세요, 고양여성민우회입니다. 한 회원으로부터 에세이 원고를 받았습니다. 성폭력 피해를 지나온 경험을 담담하게 써내린 글이었습니다. 회원님께 이렇게 귀한 글을 왜 민우회에 보내셨냐고 여쭤보았습니다. 회원님께서 제일 처음 해주신 말씀은 자신의 글이 다른 고양여성민우회 회원들, 더 나아가 다른 여성과 성폭력 피해자, 우울증 환자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이었습니다. 자신이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글에 등장하는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해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회원님께서 전화로 전해주신 말씀을 인용하며 연재글을 시작합니다.
"여러분 주위에 이런 아픔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이라도 찾아봐주고 같이 밥을 먹어주면 그 사람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글이 희망의 증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성폭력 피해와 우울증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언어화시키지 못해 괴로워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런 분들도 자기 고통을 기꺼이 드러낼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다들 죽지 않고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애도되지 못한 죽음
(사진설명) 나만의 애도_유리마루 故 임은진, 평안하시길
2021년 1월, 2012년 9월에 파주에 이사 온 후 8년 동안 알고 지낸, 미용실 원장님의 죽음을 듣게 됩니다. 1인 숍을 운영하여, 예약된 그 시간엔 그 한 사람의 머리 손질부터 샴푸까지 모두 혼자 운영하는 미용실 원장님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공간은 일종의 상담실처럼 운영이 되어, 손님은 내담자가 되고, 미용사는 상담자가 되어, 삶의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도 그 원장님과 말이 잘 통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책 이야기, 영화 이야기, 삶에 관한 이야기, 종교에 관한 이야기 등 머리를 하면서, 수다를 떨고 일종의 치유되는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던 중, 저의 우울증 이야기를 하자, 그분 역시 공황장애로 약을 복용 중이라는 고백을 하셨습니다. 동병상련이라 그런지, 서로 잘 이겨내자며 응원해 주곤 했는데... 예약하려고 카톡을 봤는데, 카톡 프로필 사진이 영정사진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임은진 원장님,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장이 어디인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그 어떤 정보도 없이 그 한 줄로 그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게 됩니다.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고,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 수도 없었기에, 그 죽음에 대해 어떻게 애도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떨어져 살았던 사랑하는 딸아이가 중학생에 접어들어, 함께 산다고 행복해했던 사람이, 왜? 도대체 왜? 왠지 저는 그가 스스로 목숨을 버렸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코로나의 장기화로 인해 소상공인들의 폐업이 줄을 잇던 시절이었고, 갖고 있던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그를 더 압박했으리라 추측해 보지만, 차라리 다른 사고로 생을 마감해 주셨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왠지 그의 죽음이 곧 저의 죽음의 전주곡처럼 저를 곧 소환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2차 붕괴_형사과 참여관 부적응
그 이후로 저는 글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글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말도 주어, 서술어가 깨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나마 배려받은 적은 업무로 인해 하루하루 출근하고, 일하다 집에 가서 잠을 자고 다시 출근하고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무엇인가 생산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판단력도 떨어져서, 그저 해오던 일을 해야 했는데, 7월에 형사과로 옮기게 됩니다. 참여관으로서는 신규인 데다, 형사업무는 신규로 발령받기 전 4개월 동안 대체 근무한 게 다라 일주일에 2번 형사 참여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형사과는 격무부서라 재판 들어가기 바쁘고, 나와서는 조서 치기 바쁜 곳이었습니다. 실무관들은 항소 기록을 조제하느라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지요. 나만 정신 차리고 적응하면 되었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게 문제였습니다.
첫 재판을 들어가자마자 숨이 막히기 시작했습니다. 여름이라, 체력이 약해진 데다, 증인신문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어지럽고 토하고 싶어졌습니다. 휴정이 선언되자 법복을 입은 채로 미친 듯이 법원 밖으로 뛰쳐나와 가쁜 숨을 내쉬었습니다. 매주 두 번씩 재판하다가는 심장이 멈추든지 아니면 숨이 멈춰버릴 것 같았습니다.
과장님과 판사님께 말씀드려서 휴직하려 했지만, 이미 정기인사가 끝난 시점이고 형사 참여는 비선호 보직이라 당장 참여관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재판은 돌아가야 했기에, 저는 종합민원실 제 증명 담당하는 행정관님과 맞트레이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제 증명 담당 행정관님은 제 증명보다는 형사 참여가 낫다고 판단하여, 저의 제의에 흔쾌히 응해주셨고, 저는 보름 만에 형사과에서 종합민원실로 발령 나게 됩니다.
3차 붕괴_종합민원실 행정관 부적응
이미 한번 정신이 나가 있는 데다, 형사 조서를 치지 못한다는 좌절감으로 업무에 대한 두려움은 커지기만 했습니다. 더욱이, 제 증명 업무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민원인들을 상대하느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데다, 정신없는 와중에 10시만 되면 우편으로 접수된 제 증명신청서가 쏟아져 내려 민원 처리하랴, 우편 처리하랴 숨이 턱턱 막히는 데, 전산화가 안 된 결정문을 창고에서 찾아 복사하랴 여름 원피스를 입었는데도 손바닥, 발바닥, 겨드랑이 등은 땀으로 범벅이고... 그러다보니, 아침마다 회사에 가는 게 꼭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아침이 오는 게 싫었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이면, 계단으로 6층을 올라가 옥상 문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습니다. 확실히(?) 죽으려면, 화단이 아니라, 지하 1층 식당 계단으로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까지 해보았습니다. 유서를 써놓고, 몇 번이고 고치기도 했지요.
명예퇴직한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해주다 이러다 사람이 잘못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제 손을 붙잡고 종합민원실 실장에게 이 사람 휴직해야겠다고 대신 말해주고 그 길로 바로 법원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우울증의 터널로 접어들다
처음엔 회사 일을 하지 않아서 해방감을 느꼈지만, 점차 병은 악화일로로 치닫게 됩니다. 우울증은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의 활동을 멈추게 합니다. 오로지 잠만 자게 하는 병입니다. 식욕도, 성욕도 앗아가고, 생의 모든 것이 의미 없게 됩니다. 세수하는 것조차 버거우니, 요리하는 것은 엄두를 보냅니다. 밥을 어떻게 안쳐야 하는지도 잊어버려, 허둥지둥합니다. 씻지를 않으니 나가고 싶지도 않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지도 않지요. 코티졸 호르몬은 노화를 촉진하여 흰 머리카락이 나게 합니다. 몸이 느려지고 둔해져서 신진대사량이 줄어들어 평소와 별다른 바 없이 먹어도 살이 불어나게 되지요.
생에 대한 기쁨이 없으니,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막하기만 하여, 빨리 심장이 멈춰 생을 마감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랍니다. 나 혼자 죽으면 애들이 괴로워할 테니, 가족들끼리 함께 조용히 한날한시에 사라지는 나쁜 상상도 해봤습니다. 애들의 미래가 암울하게 보여서, 이 아이들의 인생도 나처럼 우울해지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차라리 내 책임하에 낳았으니 내 책임하에 생명을 거둬들이고 가는 게 옳은 일이 아닐까 하는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했습니다.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거야 - 1편 보러가기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거야 - 2편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