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에세이]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거야 - 4편(번외편)

사무국
202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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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안녕하세요, 고양여성민우회입니다. 한 회원으로부터 에세이 원고를 받았습니다. 성폭력 피해를 지나온 경험을 담담하게 써내린 글이었습니다. 회원님께 이렇게 귀한 글을 왜 민우회에 보내셨냐고 여쭤보았습니다. 회원님께서 제일 처음 해주신 말씀은 자신의 글이 다른 고양여성민우회 회원들, 더 나아가 다른 여성과 성폭력 피해자, 우울증 환자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이었습니다. 자신이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글에 등장하는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해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회원님께서 전화로 전해주신 말씀을 인용하며 연재글을 시작합니다.

"여러분 주위에 이런 아픔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이라도 찾아봐주고 같이 밥을 먹어주면 그 사람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글이 희망의 증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성폭력 피해와 우울증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언어화시키지 못해 괴로워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런 분들도 자기 고통을 기꺼이 드러낼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다들 죽지 않고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故 임은진, 평안에 이르렀기를

 

나의 유리마루

실장님, 유리마루가 사라진 이후, 저는 한 미용실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녀요. 어디를 가도 실장님만 한 분이 없더라고요. 어쩌면 일부러 정착하지 않으려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긴 시간을 함께한 사람을 그리 허망하게 보내는, 그런 아픔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요. 가끔 힘들거나, 울적할 때, 유리마루 가게로 가요. 실장님이 더 없다는 거 알아도, 그저 그곳을 차로 두어 바퀴 돌고 나면, 마음이 한결 나아져서요.

 

후견 감독_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저는 지금 G 지원에서 후견 감독을 하고 있어요. 지난번 후견 감독 연수가 있었는데, G 지원이 미제가 가장 많았어요. 물론, 전체건수로는 서울가정법원 4,100건을 따라서 올 수가 없지만, 거긴 후견 감독관이 15명이나 있거든요. G 지원엔 저 혼자서 현재 기준 800건 이상을 감독하니, 이제 상상되죠?

근데, 저는 소송(訴訟)보다는 비송(非訟)이 더 좋더라고요. 소송(訴訟)재판부는 중립적인 심판위치에 있어야 해서, 당사자들에게 냉정해질 수밖에 없고, 법률상담은 법률전문가나 대한법률구조공단으로 가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근데 비송(非訟)은, 대립적인 상대방이 없고, 사건본인과 후견인밖에 없어서, 더 다정하게 대해줄 수 있고, 맘 편히 법률 상담해 줄 수가 있어요.

아시죠? 저 이론뿐만 아니라, 실제 소송(訴訟)사건을 많이 경험한 거. 그래서 후견인들에게 더 많은 법률상담을 해줄 수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 후견인들이 저에게 찾아와서,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고 가고, 때로는 울먹이면서 감사하다고 하고 가요. 그때마다, 일하는 보람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올라와요. “사람에게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성서 전도서 2장 24절).”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다니! 지난 법원 생활을 떠올려 보건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후견 감독 일이 너무 좋고, 저를 행복하게 한답니다.

 

힘든 후견 사례_뇌사 판정 받은 아내

그런데 오늘은 일이 너무 힘들었어요. 남편이 아내에 대해 후견 개시하는 사건이 하나 있어요. 아내가 사업을 하다가 빚 독촉에 시달렸대요. 심지어 아내의 아버지와 오빠에게 소송(訴訟)을 당하기도 했고요. 그러면, 그냥 개인회생이나 파산하면 되는데, 아내가 금융권 채무가 아닌 개인적인 채무라 그 생각을 못 했나 봐요. 그래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했대요. 딸아이가 이번에 초등학교를 입학하던데….

저는 그 사건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뭔가 도울 일은 없을까 하다, 후견 감독 연수 때 조사관님께 여쭤보니, 개시 결정 전에도 조정 조치 즉 상담사가 직접 후견인과 가족들을 방문(4회, 회당 10만 원 지원)하거나, 상담실로 찾아가서 상담(8회, 회당 4만 원 지원)받을 수 있더라고요.

교육을 마치고, 이 기쁜 소식을 후견인 즉 남편에게 알려야겠다 전화를 했는데…. 딸아이는 고모가 데리고 가서, 고모네 집 근처 학교에 입학했대요. 그런데, 엄마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했던 걸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딸아이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빠는 그 사실에 너무 괴로워하더라고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할 말을 잃었지요. 하지만 아파만 할 수 없죠. 저는 후견 감독관이니까요.

아이는 고모 집 근처에서 상담을 받기로 되어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후견인 남편에게 본인도 받으셔야 하지 않겠냐고. 그랬더니, 그 남편이, 자기는 그 사건 이후로 힘들었지만, 딸아이 입학을 기점으로 정신 차려야겠다고 다짐했다면서, 다시 그 이야기를 내뱉어 버리면 또다시 그 감정에 휩싸일 것 같다면서…. 지금은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알겠습니다, 실장님. 그래도 힘드시면 지금 이 전화로 언제든지 전화해 주세요. 어떤 도움이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해요. 딸아이에겐 실장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게 이야기하니 전화기 너머 남편분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나더라고요.

 

살아남은 자의 고통

그렇게 전화를 끊고, 이틀이 지나, 실장님의 죽음에 대해 글을 올렸는데…. 점심 먹고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더라고요. 그래서 휴게실에서 잠시 쉬는데, 눈물이 터져 나오더라고요. 이제는 다 극복했다 생각했는데…. 아직 실장님의 죽음에 대해 극복하지 못했더라고요.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지 못하니, 당신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지 못해서 그래서 눈물이 터져 나왔어요.

나만 살아남았다는…. 그런 죄책감이 나를 괴롭혔어요.

우리 서로의 병에 대해 잘 알았잖아요.

그럼 서로 위로하고 도울 수 있었는데, 하필, 코로나로 그리고,

하필이면 그때, 저에게 우울증 삽화가 다시 시작되는 바람에….

실장님이 힘들 때, 도울 수가 없었어요.

돕는 게 별거 있어요.

그저 자주 연락하고, 이야기하고…. 그래서 고립되어 있지 않다고, 

여전히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그 느낌을 주는 거 그게 다인데….

그 당시 나는 아파서, 집에서 나올 수가 없었어요.

회사에 다니질 않으니, 머리를 할 필요도 없었고, 그래서 예약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때, 당신이 그렇게 힘들었다는 걸 알았다면,

그걸 핑계로 삼아서라도 머리하러 갔을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해봤자, 소용없다는 거 알아요,

이제 실장님은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까요.

 

또 다른 임은진을 만나

  저 2023년에 등기소로 복직했어요. 1년 7개월 만에 복직이었어요, 다시금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저는 다시금 생기 돌기 시작하더라고요.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니까, 주위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어요. 그 당시 공익근무요원 청년 중의 한 명이 우울증, 대인기피증으로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자주 결근하기도 했는데, 동병상련인지, 자꾸 마음이 가더라고요. 그래서 일부러 문자도 하고, 밥도 사주고 돌보기 시작했어요. 너무 장기간 오지 않을 땐, 집으로 찾아가, 그 청년 아내를 만나서, 근황을 물어보기도 했어요. 일찍 결혼해서 세 살배기 딸도 있는데, 세 사람이 집에서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 아내께, 아이는 어린이집에 맡기고, 두 사람이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해야 한다고 주제넘게 오지랖도 부렸지요. 제가 좋아하는 명상록(아우렐리우스) 책을 선물하면서 그 사이에 설 명절 떡값도 끼워 넣어줬더니, 서너 시간 후에 그 공익 청년에게서 연락이 오더라고요. 정말 감사하다고.

저는 그렇게 위태로운 사람만 보면, 실장님이 생각이 나서, 내가 뭐라도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살 수만 있다면, 제가 뭔들 못하겠어요. 다행히 그 청년은 재검을 받아, 군 면제 판정을 받았고, 더 등기소에 나오지  않아도 되었어요. 그 청년이 바라는 대로 이뤄져서 기뻤고, 등기소도, 관리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요.

 

소소한 추억

 말이 길어졌네요. 뭐 이 정도야, 저 머리하는 동안 실장님과 대화하는 것에 비하면 짧은 편이죠. 가끔 저보다 실장님이 말이 많아지면, 지금 이 사람이 내 머리를 해주는 건지, 내가 상담을 해주는 것인지 헷갈릴 때 많았던 거 아셨어요? ^^; 제가 더 말을 많이 해야 스트레스가 풀리는데, 실장님이 더 말을 많이 해서 살짝 욱했어요. 그때는 말 못 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코펜하겐 떡볶이집

오늘 저녁으로 유리마루 자리 가게에 들어선 피자집에서 피자를 주문하러 갔는데, 영업을 안 하는지 문이 닫혔더라고요. 그래서 마음이 무거웠어요. 장사가 잘되셨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다행히 옆집 떡볶이집 “코펜하겐”은 문이 열렸더라고요. 실장님이 갑자기 미용실 하다가, 떡볶이집을 열겠다고 하셔서, 만드신 그 코펜하겐. 코펜하겐은 여전히 그 이름으로 남아있었어요.  저는 떡볶이를 주문하면서 코펜하겐 주인에게 옆집 유리마루 미용실 사장님을 아시는지 여쭤봤어요. 그랬더니 코펜하겐 사장님은 피자가게가 들어선 후 자리를 이어받으셨는지, 옆집이 유리마루 미용실이었다는 것은 모르셨어요. 또 이렇게 실장님에 대해 알지 못해서 서운했는데….

 

연결된 세상

 제가 다니는 교회 교인 카톡방에 요새 올리는 글을 올리거든요? 오늘 자 실장님에 대한 글과 실장님 가게에다 제가 갖다 놓은 꽃바구니 사진을 같이 올렸더니, 세상에! 그 근처에서 가죽 공방하시는 실장님이 코펜하겐을 알고, 실장님을 안다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가까이에 실장님을 아는 사람이 있다니. 세상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네요. 실장님이 남자인 것도 아시고, 실장님이 위태로워 보였다는 것도 아시더라고요. 근데 실장님이 돌아가셨다는 건 모르셨는지, 제 이야기를 듣고 놀라셨어요. 그 실장님께 이번 주 교회 오시냐 여쭤봤어요. 실장님에 대해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너무 기뻤고, 그래서 실장님에 대해 같이 기억할 수 있기에 그렇게 당신에 대해 말하면서 나는 드디어 당신을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至安

나의 애도는 지금부터입니다.

임은진 실장님.

정말 고마웠어요. 당신은 남자였지만, 당신 안에 넘치는 아니마(여성성)와 나의 아니마는 동무였어요.

혼자 살아남아 미안해요.

그 미안한 마음, 빚진 마음으로 또 다른 위태로운 당신을 돕고 싶어요.

아마, 그게 내가 할 일인 듯해요.

밤이 늦었네요.

이제 자야겠어요.

그곳에서는 평안하길.

 

至安.

평안함에 이르기를.

 

2024.3.13.

영원한 벗 蓮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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